얼마 전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Asian Wall Street Journal)지를 읽던중 엄청 크게 다룬 기사 하나에서 ‘Korea’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전문을 읽어보고서는 나도 모르게 ‘쯧쯧’하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기사 내용은 L&H 본사와 한국 지사의 최근 상황에 관한 것이었는데, 특히 지난해 말쯤 한국 지사장이었던 사람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
벨기에에 있는 L&H 본사측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 지사장이 판매 규모를 허구로 늘려서 자신의 이익을 챙긴 후 사라진 과정이 워낙 교묘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여서 경영대학원 과정에서 특별 과목으로 지정해도 될 정도라고까지 했다.
글쎄, 사건의 전말을 100% 알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그리 드문 종류의 사건도 아닌 것 같고, 또 사기 방법도 머리를 그리 많이 써야할 만큼 용의주도한 것이 아닌 것 같았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그 수법에 상당히 감명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자세한 사정은 신문 기사를 검색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룰 수 없는 매출 목표를 세워 놓은 다음에 이를 달성한 것처럼 속여 그에 대해 지급된 세일즈 인센티브를 받은 다음 자취를 감췄다는 내용이다. 감사 회사와 본사에서 주장하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의 옛 지사장은 자그마치 2500만 달러를 인센티브로 챙긴 것이 된다나…
지난 달에는 필자의 친구 하나가 예고도 없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미국의 한 전자부품 업체의 이사로 일하고 있는 그 친구는 한국 지사 설립을 위해 직접 날아와서 일주일 정도 일을 추진하고, 며칠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어차피 필자도 미국 회사의 한국 지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뭔가 자문을 받고 싶어서 시간을 내서 찾아왔다고 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필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바로 회계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네가 기획한 대로 하고, 실무는 모두 한국 지사장에게 맡겨라. 하지만 회계 관련 사항은 한국 지사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안된다. 반드시 외부에서 견제할 수 있게끔 회계 법인 등을 통해야만 한다”라는 게 필자의 충고였다.
한국 내에 있는 기업 중에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돈을 빼내어 챙기는 경우가 자주 있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이른바 방만한 경영 내지는 경영자의 사리사욕 때문에 결국 망해가는 일을 적잖게 보아왔다.
창업자가 대표로 앉아있는 벤처 기업이나 외부에서 초빙한 CEO가 앉아있는 벤처 기업 모두 외부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게 되므로 그런 쪽으로의 유혹이 적지 않기도 하다. 더욱 문제가 커질 수 있는 것은 외국에서 한국으로 투자했거나 직접 세운 지사의 경우다.
본사에서 한국 상황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한국쪽에서는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활용해서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L&H 코리아의 전신은 잘 나가던 벤처 기업이었다. 벨기에의 L&H 본사가 사업 확장을 위해 그 회사를 인수해 한국 지사로 만들고, 원래 사장을 그대로 지사장에 앉힌 것이었다.
출범 당시에는 일류 호텔 그랜드 볼룸을 빌려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행사도 벌이고, 사원들의 연봉 수준도 웬만한 다른 회사에 비해 크게 올려줬다는 얘기도 들리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물론 한국 지사에서는 이런 사태와 관련없이 재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니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래야만 돈을 갖고 튄 사람 때문에 애꿎은 사원들이 큰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경우로 PSInet 코리아가 있다. 이것도 원래는 ‘아이네트’라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였고, 미국의 PSInet이 인수해서 한국 지사가 된 경우이다. 이 회사의 창업자 겸 당시 사장은 지사장으로 임명됐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른 회사를 차려나갔다. 요즘 이 회사의 미국 본사는 인터넷 경제의 거품이 사라지면서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1년 사이에 주가가 자그마치 99%나 하락해 나스닥에서 퇴출되는 것은 물론 회사 자체가 정리될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건실한 경영을 하고 있던 PSInet 코리아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벤처 기업들이 해외의 대기업에 좋은 값을 받고 인수되는 것을 상당히 성공적인 케이스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때 돈을 버는 사람은 주요 지분을 갖고 있던 창업자와 투자가들뿐이다.
위에서처럼 잘못될 경우에 불쌍해지는 것은 결국 일반 사원들 뿐이다.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빛을 보나 싶었더니 외국 회사에 인수돼 버리고, 그러다가 해외 본사의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한국 지사로 설립된 회사만 해도 그렇다. 한국에 각각 지사를 두고 있는 두 외국 회사들이 합병하게 되면 한국에 있는 두 지사의 사원들은 그 와중에 머리 터지는 생존경쟁을 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맥스터가 퀀텀의 하드 디스크 부문을 합병하면서 두 회사의 한국 지사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한편, 아예 회사가 망하면 더 비참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에서 별로 장사할 건덕지가 없게 되면서 본사 상황과는 관련없이 어느날 갑자기 문을 닫아버리기도 한다. 문득 몇 달 전에 한국에서 필요없어졌다는 이유로 전격적으로 문을 닫은 노벨(Novell)이나 아이오메가(Iomega) 한국 지사도 떠오른다.
필자는 중간에 합류했지만 필자가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도 원래는 벤처 회사였다가 미국 기업에 의해서 투자를 받고 인수돼 여러 가지 사연을 안고 오늘에 이르게 된 배경이 있다.
그런 면에서 위에서 보인 경우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결국 남이 넘볼 수 없는 기술과 기존의 조직력을 굳게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L&H와 PSInet, 두 회사의 한국 지사들의 향방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