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인가 자격증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공언한 교육부 장관이 있었다. 뭘 알고 그랬는지, 현실을 제대로 살펴보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마디 때문에 많은 학부모와 수험생들 사이에 자격증 취득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보면 자격증으로 대학에 갈 수 있게 한다는 정책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하긴 교육부 장관과 일반 국민들 사이에 서로 이해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당시 교육부 장관의 생각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건 대전에 있는 대학교건 혹은 양평군 양서면에 있는 이름 모를 대학교든 어디든 간에 최소한 대학은 갈 수 있게 하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2년제, 3년제, 4년제 가운데 최소한 어딘가는 갈 수 있다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잘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대학교이기만 하면 됐지 뭘 바래? 교육부 장관이 책임지고 전국 대학을 평준화시키면 되지 않겠어? 라는 식의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반면 귀가 솔깃한 학부모들에게는 자격증을 취득하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수 있다라는 말로 들렸었나 보다. 무슨 자격증인지 어떤 대학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대학 입학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바야흐로 자격증 천하가 됐다. 심지어는 중학생이나 초등학생들 가운데에도 자격증에 도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이고 또 환갑을 넘긴 어른들도 이런저런 자격증 대비 시험에 학구열을 불태우기도 한다. 자격증의 종류도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다.
한자검정능력 자격증, 애견미용사 자격증, 수지침 요법사 자격증, 통역사 자격증, 조리사 자격증 같은 것을 비롯해서 증권 분석사, 투자상담사, 속기사, 번역사, 통역사, 공인중개사 같은 자격증들도 신문 지상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전통이 있는 자격증으로서는 변호사 자격증이나 회계사 자격증, 의사 자격증들도 있긴 한데 이것들은 꽤 어려운 편이다.
IT 분야도 이런 자격증 열풍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실 IT 자격증이란 것은 일반인들이 자격증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훨씬 전부터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가장 전통적인 것으로는 정보처리기사와 기능사 자격증같은 종류라고 하겠지만 요즘엔 그런 게 아직 있나 싶을 정도로 다른 자격증의 그늘에 가려 있는 상태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대학 졸업장과 운전면허증 외에는 자격증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아닐까도 싶다.
요즘 여기 저기서 보고 듣게 되는 자격증의 명칭을 보면 도무지 머리 속에 탁 들어오지 않는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MCSE, MCSD, MCAD, CCIE, ACP, ASEP, SICP, OCP, HPCP, RHCE, SCPP, RCNP, JNCIS, CCSA, SPS, SCCD, CCNA, CCP, CISA, CISSP, GIAC… 이밖에 얼마나 더 많은 IT 관련 자격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필자로서는 적어도 CIA나 FBI, KGB는 그런 자격증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CIA 자격증도 있긴 하다. ‘Certified Internal Auditor’ 자격증이 그것이다. 어쨌든 한편으로 또 궁금한 것은, 그 많은 IT 자격증 가운데 사람들이 어떻게 다들 자기에 맞는 종류를 골라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물론 한마디로 IT라고 해서 단순히 하나로만 생각할 순 없는 것이고 그 안에도 아주 많은 세부 분야가 있는 것이지만 일반 전산인들에게는 그것들을 구분해 내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한편, 취업을 앞둔 전산 전공 학생들에게도 자격증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처럼 취업이 힘들다고 하는 시기에 IT 자격증은 TOEIC 영어점수보다 취업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어서이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설사 취업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IT 자격증은 직장 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마법의 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기업에서도 IT 자격증을 가진 대학졸업생이 어떤 전문가의 능력을 보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참고사항으로 생각할 뿐이고 입사 지원자가 많은 상황에서라면 그걸 통해서 지원자를 좀더 걸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IT 자격증을 가진 신입사원과 자격증이 없지만 5년의 현장 경험을 가진 두 사람 가운데 기업은 어떤 쪽을 선호할 것인가? 기업에서는 바로 경험과 경력을 중요시한다. 변호사나 의사라면 자격증이 없이는 아예 현장 경험도 할 수 없겠지만 IT 산업에서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편, 이미 기업에 채용돼 일을 하고 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자격증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없을 때를 생각해 보자. 이때 자격증없는 사람의 업무 수행 능력이 자격증 소지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물론 자격증이 별로 소용이 없어진다. 자격증은 만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즉 경쟁해야 할 사람들이 다들 학교를 졸업한 무경력자이거나 아니면 별로 능력 차가 없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일 때라야 비로소 자격증이 투자비를 회수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격증이 전혀 소용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격증은 어느 정도의 실무 경력이 뒷받침되고 또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에서만 뒷받침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자신의 실력을 남들과 비교하는 데에 쓰일 수도 있고 또 이제껏 배워온 것을 정리하는 용도로도 쓰일 수도 있다. 공연히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시험공부에만 너무 치우치지 않고 실무 경험을 갖는 데에도 신경쓰라는 얘기다.
그나저나 2005년이 되면 자그마치 15만 명의 IT 전문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는데 그 숫자가 어떻게 산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숫자를 어떻게 다 확보하려는지 궁금해 진다. 혹시나 관련 학교와 교육기관을 엄청나게 증설하든지 또 다른 종류의 자격증을 잔뜩 만들어 놓고 그걸 취득한 사람들의 머리수로 세어서 해결됐다고 자화자찬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요즘도 IT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고 난리지만 주변에는 취직 못하는 IT 전공자들이 적지않아 보인다. 문제는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그걸 활용할 줄 아는 인력이 부족한 것인데 공연히 숫자만 채우느라고 난리치는 게 아닌가 싶다. 좀더 현실감있는 사람이 정책자가 되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할 것 같다.
쓸데없이 자격증만 있으면 대학간다라는 식의 허풍만 떨지 말고 말이다. 그런 사람이 교육부 장관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선 교육부 장관 자격 시험이라도 치뤄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