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전쯤 필자가 어느 대기업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을 때 얘기다. 그 당시 연구소에는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요즘에야 고학력의 훌륭한 인적 자원이 많아서 어느 기업 연구소를 가더라도 ‘너는 김박사 나는 이박사’하는 식으로 박사급 연구원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 연구소가 유달리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로 이뤄진 연구 그룹이었다. 그룹 내에 총 다섯 개의 팀이 있었는데, 필자는 그곳에서 8명의 연구원으로 구성된 한 팀을 맡고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필자를 제외한 다른 네 팀의 팀장은 모두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중 세 사람이 미국에서 학위를 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이른바 미국 박사라고 해서 아무나 뽑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내 공대 서열을 정해서 전자 전산 분야에서 50위 이내에 들어간 학교 출신만 뽑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밑의 팀원들을 봐도 석사 혹은 박사급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래서 인력면에서는 남들이 보기에는 참 훌륭한 연구소로 보일 수 있었다.
팀장중에서 유일하게 학부 졸업장만 있는 필자는 일반 사원들에게는 좀 특이한 존재로 보였나 보다. 어쩌면 가방끈이 짧아서 그랬을런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그래도 주어진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항상 소정의 결과를 내서 끝마치곤 했었다. 어찌보면 박사 학력이 없는 학사나 석사 연구원들에게는 일종의 표본적인 역할이 되기도 했다. 저런 사람도 팀장이 될 수 있고 박사 딱지가 안붙어도 책임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박사 타이틀을 이마에 붙인 사람이 등장했고 결국 회사의 의도를 알아차린 필자는 스스로 회사를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에 필자가 그 사람 밑에서 일하기엔 너무 머리가 큰 것이 문제였다. 또 한편으로는 자존심 측면도 있었고, 회사측의 처사에 반기를 드는 의미도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필자도 그보다 훨씬 전에 외국에서 학위를 딸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다. 두 경우 모두 회사에서 비용을 대는 조건이었지만 필자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물론 학문을 더 갈고 닦는다는 점에는 적지 않은 관심이 있었지만, 그때 만약 필자가 그 공부를 했다고 하면 이마에 박사학위 딱지를 붙이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즐겁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공부하고 싶은 것을 공부하며, 매달받는 월급으로 재미있게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긴 세월을 보내기가 아까웠고, 회사에서 지원한 학위 취득 뒤에는 짧지 않은 세월을 또 그 회사에서 일해야 한다는 오블리게이션이 있는 점도 달갑지 않은 조건이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최소한 그 회사에서 어지간해선 잘리지 않을 것이므로 직업의 안전성이 보장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뭔가 조건이 달려 있으면 어딘가에 매이는 것 같았고 젊었던 당시로서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국내 대학교에서도 학위는 취득할 수 있다. 또 직장 생활을 계속 하면서도 석사 혹은 박사라는 타이틀만을 따고자 한다면 또 다른 방법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도 별다른 관심이 가질 않았다. 명목상으로만 취득하는 학위라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어서이다. 거기엔 사연이 있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지 몇 년 뒤에 필자는 레이저 홀로그램이라는 기술을 이용한 시스템의 하드웨어 개발을 하게 되었는데, 그에 관한 기술 자료라는 것이 너무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해외자료와 국내자료를 뒤지고 있었는데 문득 국내의 어느 대학 박사 논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필자가 개발하고자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기능의 장치를 만든 내용이었다. 박사학위 논문이니 당연히 수준이 높지 않겠는가.
하지만 논문을 대충 훑어 보고 난 뒤의 필자의 심정은 착잡했다. 국내에서 학교 간판으로는 손꼽힐 정도의 명문이라는 학교에서 나온 박사학위 논문은 한마디로 대학교 학부 수준에도 못미치는 내용이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짓말이 너무 많이 쓰여있었다.
설계해서 만들었고 실험에 성공했다는 회로의 도면을 보니 전혀 동작조차 할 수 없는, 그저 머리속으로만 상상해서 간단한 회로 이론을 응용해 그린 것이었다.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는 그 박사 논문은 전혀 실제로 제작을 했거나 실험한 결과가 아니라 대충 짜집기한 허접 쓰레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논문을 쓴 사람은 직장 생활을 오래 한 후에 그 산업대학원을 다녔고, 안식년 차원에서 비용은 직장에서 대준 것이라고 했다. 특별히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논문도 대충 형식적으로 쓰면서 햇수만 채우면 된다고 하니 결국 그런 아저씨들은 그런 식으로 교수님들의 자금원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런 박사 학위를 가지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서 훌륭한 인력구조를 가진 기업 연구소의 구성원이 되기도 하고 혹은 학위의 권위로서 연구원들을 이끌게 되면 좋은 의미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일들이 단지 예전의 일이라고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요즘에도 여전히 학교를 다른 목적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학에 들어가면서도 이른바 명문대학을 졸업했다는 타이틀을 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요즘엔 일상적이기도 하니 무얼 탓할 수가 있겠는가.
오늘날의 대학들은 돈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그런 식으로나마 수익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면 마다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앞을 다투어 야간에 강의하는 경영대학원이니 정보통신 대학원이니 하는 것들을 세우는 게 아닌가. 학구파에게 있어 그런 곳에 다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습득하는 게 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는 인맥 형성과 학위 취득이 최우선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요즘 학력 인플레가 생기면서 업계에는 석사나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상당히 많아졌다. 문제는 그런 학위가 진정 그들의 능력을 대변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난번 컬럼에서 자격증이 실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학위라는 것이 실력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껍데기에 불과한 학위를 따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할 것이라면 차라리 현업에서 그만큼 노력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건 학력과 학위의 무용론을 펴는 게 아니다. 일이면 일, 학업이면 학업, 뭐든지 제대로 하자는 것이고 껍데기를 쓰지는 말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