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퀴즈를 하나 내보겠다. 역사상 최초의 하드디스크는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을까? 학교나 학원에서 컴퓨터의 역사를 배우면서 이런 내용까지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최초의 하드디스크 개발자는 IBM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1956년의 일이고 그 때의 용량은 5MB였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의 대형 컴퓨터에나 설치될 수 있는 덩치를 가진 것이었고 일반 사무실에 설치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8인치 하드디스크가 개발된 것은 1979년에 역시 IBM에 의해, 그리고 PC에 내장할 수 있는 정도인 5.25인치는 1980년에 시게이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현재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3.5인치 하드디스크는 영국의 로다임(Rodime)이란 회사가 1983년에 처음 개발했고 요즘 노트북 컴퓨터에서 주로 쓰이고 있는 2.5인치 드라이브는 1988년 미국의 프레어리텍(PrairieTek)에 의해 개발됐다. 로다임은 현재도 존재하고는 있지만 3.5인치 드라이브를 개발했을 때 출원한 특허의 사용료를 받는 정도이고, 프레어리텍은 코너(Conner)가 2.5인치 시장에 뛰어들자마자 곧 도산해 버렸다.
5.25인치, 3.5인치, 그리고 2.5인치 하드디스크가 개발되는 과정에서의 변화를 보면 그저 이전 것보다 크기만 작아진 것은 아니었다. 실험실에서 고안된 새로운 기술이 적용됐고 인터페이스 방식도 급진적인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가령 5.25인치 디스크 시대에는 두 개의 플랫 케이블을 사용하던 ST-506/412가 표준이었지만 3.5인치 시대에는 완전히 개념이 달라져서 IDE 방식이 기본이 된 것이 그 예이다.
다른 예로는 자기헤드에서 박막헤드와 자기저항 헤드(MR; Magneto-Resistive Head)의 진화나 저장 인코딩 방식과 서보모터(Servomotor)의 변천, 그리고 SCSI 인터페이스의 전송 속도 향상, 디스크 회전속도 같은 부분에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어왔다.
사실 2.5인치 하드디스크가 시장에 나오던 시기 즈음해서 컴퓨터 업계에서는 과연 언제 반도체 메모리가 하드디스크 같은 자기 기록 매체를 완전 대체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었다. 10년 전만 해도 그 뒤로 몇 년 이내에 반도체가 하드디스크의 자리를 빼앗기 시작할 것이라는 예상이 적지 않았다.
현 시점에서는 물론 아직도 컴퓨터의 보조 기억 장치로서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는 부동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그 입지가 바뀌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그만큼 하드디스크의 용량과 성능이 크게 개선돼 왔고, 반면에 반도체 메모리의 집적도와 가격은 상대적으로 하드디스크의 그것을 훨씬 능가할 만큼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드디스크에 대한 의구심은 컴퓨팅 환경이 휴대형으로 또 소형화로 진행되면서 커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트북에서 주로 사용되는 2.5인치 디스크의 성능에 대해서 회의가 많았었는데 그것 때문에 모바일 분야에 있어서 하드디스크의 한계가 가까웠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80GB 용량에 7200RPM의 회전속도를 내는 수준의 제품들이 만들어지면서 데스크톱 PC와의 성능 격차를 줄여가고 있으니 그 분야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80GB 용량을 가지는 1.8인치 하드디스크까지 등장하면서 오히려 반도체 메모리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재미있는 상황이 되고 있다.
PDA나 휴대폰, 디지털 카메라, 그리고 포터블 MP3 플레이어같은 물건들에 있어서 데이터의 저장을 위한 공간은 최근까지는 거의 반드시 플래시 메모리로 만들어져 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하드디스크가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당연히 기존의 하드디스크의 영역을 플래시 메모리같은 반도체가 침범하리라고 여겨왔는데 말이다.
가장 먼저 공략 당한 것은 포터블 MP3 플레이어이다. 처음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MP3 플레이어는 당연히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돼 왔다. 그래서 32, 64, 128, 256MB 등과 같은 식으로 그 용량이 향상돼 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600MB가 넘으면서도 값이 싸다는 이유로 CD 방식의 MP3 플레이어가 나타나 시장을 갉아먹더니 이제 그보다 훨씬 큰 용량을 가지면서도 음악을 플래시 메모리처럼 맘대로 쓰고 지울 수 있는 10GB 혹은 30GB 용량을 가진 HDD 기록 방식의 MP3 플레이어가 시장에서 팔리고 있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CD 방식의 MP3 플레이어가 플래시 메모리 방식을 추격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미국 시장에선 상황이 크게 달라져 버렸다. 사운드카드로 유명한 크리에이티브에서 노매드 쥬크박스(Nomad Jukebox)가 달궈놓은 시장을 애플의 아이포드(iPod)가 활활 불질러 놓은 셈이 된 것이다.
NPD 테크월드 사이트의 자료에 의하면 작년 4분기의 MP3 플레이어 시장 점유율을 보면 대수면에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11%가 약간 넘으면서 1위인 RCA의 12.95%보다 약간 낮은 수준에 머물렀지만, 매출액에 있어서는 약 27%를 차지하면서 2위인 리오(Rio, 필자가 한때 일했던 소닉블루의 브랜드) 계열 모델들의 총합인 10% 수준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이는 애플 제품의 가격대가 그만큼 높기 때문인데 애플 제품은 당연히 하드디스크를 사용하는 아이포드 모델들밖에 없고 리오같은 다른 업체들도 하드디스크 방식 제품을 내놓고 있으므로 하드디스크 방식의 MP3 플레이어가 차지하는 포터블 MP3 플레이어의 성가는 더욱 높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다른 휴대형 디지털 제품들의 경우는 어떨까. PDA나 디지털 카메라에 있어서 2.5인치는 물론 1.8인치 HDD까지도 큰 편이라서 적용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1인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이다. 이미 1999년에 IBM은 마이크로 드라이브 (MicroDrive)라는 이름의 1인치 하드디스크를 발표했었는데, 당시의 용량은 170MB와 340MB급이었고 현재는 1GB 용량까지 판매하고 있다.
이 마이크로드라이브는 컴팩트플래시 II 인터페이스 슬롯에 그대로 끼워 넣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디지털 카메라 매니아들 사이에는 이미 꽤 알려져 있는 편이다. 또한 컴팩트플래시 인터페이스가 내장된 PDA에서도 사용되곤 하는데 필자도 한때 340MB 급 마이크로드라이브를 CASIO 사의 카시오페아 PDA 에 끼워 넣고 쓴 적이 있었다.
1인치 하드디스크의 용량이 다소 작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저장용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미 미국 코니스(Cornice)에서는 1.5GB 제품을, 그리고 중국의 GS마이크로드라이브에서는 2.4GB 제품을 발표했고 올해 안으로 4.7GB급까지도 등장할 것이라고 하니 PDA와 디지털 카메라같은 정도의 장치에서는 사용에 충분한 나머지 넘칠 정도의 용량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고해상도의 사진을 찍으면서 JPEG 포맷이 아닌 TIFF 등과 같이 화질 손실이 없는 포맷으로 저장하는 경우에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가격 또한 1GB급 드라이브가 현재의 200달러 수준에서 100달러 정도로 떨어질 것이라고 하니 호랑이에 날개를 다는 격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 캠코더 분야는 1인치 하드디스크의 또 다른 응용 대상이 되고 있다. 한 예로서, 삼성전자에서는 코니스의 1.5GB 하드디스크를 내장하여 MPEG-4 방식으로 압축된 640☓480 해상도의 동화상을 66분 정도 저장할 수 있는 모델의 시제품을 발표했다. 일반 6mm 디지털 캠코더가 MPEG-2 방식으로 압축하여 테이프에 1시간 분량을 저장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사용이지만, 테이프는 순차(Sequential) 액세스인데 반해 하드디스크는 랜덤 (Random) 액세스를 할 수 있다는 점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능상의 차이와 편리성을 더 해 줄 것이 아니던가.
궁극적인 모바일 장치라고 하면 그건 바로 휴대폰이다. 필자도 하드디스크가 휴대폰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바로 크기 때문이다. 3.5인치 시절에는 설마 그보다 더 작게 만들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가졌었고, 그리고 3.5인치 드라이브가 개발되어 나온 뒤에도, 또 2.5인치를 사용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하지만 요즘엔 그것이 하드디스크 분야의 기술 발전을 잘 몰라서 가지게 된 억측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최소한 휴대폰에 내장될 수 있는 HDD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긴 미세 기계 장치까지도 만드는 나노테크라는 분야가 새로이 떠오르는 상황인데 어디까지를 한계로 여길 수 있을까.
아무튼 업계에서는 현재 0.7인치 하드디스크가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언제 어떤 성능을 가지게끔 만들어질 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 크기라면 플래시 메모리의 아성인 휴대폰에서도 하드디스크가 탑재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단, 실용화된 모델이 1~2년 이내에 개발된다는 단서 아래서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플래시 메모리 개발 속도로는 4~5년 후에는 4GB급 플래시 메모리카드 가격이 100달러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고 일단 거기에 뒤지면 시장성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컴퓨터 저장장치에 관한 컴퓨터의 역사책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HP가 10여년 전에 하드디스크를 개발했었고 그 당시의 컴퓨터 환경에서는 어디에 쓰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1.3인치 하드디스크를 생산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1992년이었으니 기술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제품이었으나 시장 형성이 될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9년에 IBM이 발표한 1인치 하드디스크도 그때부터 최근까지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IBM은 결국 히타치의 자회사인 HGST(Hitachi Global Storage Technology)에 사업을 매각해 버린 정도이니 말이다. 그때의 실패로 인해 HP는 하드디스크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버렸다. 하지만 이제 초소형 HDD 시장이 만개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러 해 전에 반도체 메모리에 의해 조만간 축출되리라고 예상되었던 하드디스크의 반격이 시작된 셈이다. 과연 하드디스크의 역사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