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래왔듯이 올해도 추석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필자의 가족은 험난한 교통난을 뚫고 본가에 다녀온 뒤 다시 서울의 처가를 방문했다. 집에서 인터넷 상의 도로공사 사이트를 통해 교통상황을 보며 분석을 하다가 전반적으로 무난하다 싶을 때 출발했기 때문에 그나마 그리 큰 고생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꼭 추석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을 방문할 때는 여덟살 난 아들이 까다롭게 굴곤 한다. 그 녀석이 따지는 것은 방문하려는 집에 컴퓨터가 있는지, 그리고 인터넷이 연결돼 있는지의 여부이다. 바로 온라인 게임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유치원에 다니면서 컴퓨터를 많이 만지지 않던 아들내미는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친구들의 영향으로 크레이지 아케이드라는 게임에 입문을 하더니만 매일같이 컴퓨터를 붙잡고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나이의 아들을 가진 필자의 친구 하나는 일주일에 하루만 그걸 허용한다고 하지만, 필자는 하루에 한 시간씩만 하자는 약속 아래 그 게임을 허용했다.
그랬더니 어느 집에 가나 그 집에서 하루 이상 묵게 될라 치면 그 게임을 약속대로 하루 1시간씩은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필자의 본가에는 주로 온라인 바둑을 목적으로 메가패스가 설치돼 있고, 처가집에는 주로 온라인 고스톱을 위해 두루넷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아들 녀석의 욕구는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추석 때 자신의 외할머니 컴퓨터에서 게임을 마친 아들이 필자에게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아빠, 여기 컴퓨터는 너무 느려서 집에서 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 키보드가 우리 집 것보다 너무 안 좋아요. 이 집에선 키보드부터 좀 바꿔야겠어요.”
아하! 키보드의 품질에 대해 불평하다니. 기껏해야 커서키와 스페이스, 그리고 엔터키를 주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이제 녀석은 단순히 컴퓨터를 주어진 상태 그대로 사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인체 공학적인 면에서 좀더 민감한 수준으로 넘어가는 단계인 것이었다. 그만큼 키보드는 컴퓨터를 어느 정도 이상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날 갑자기 꽤 중요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마우스나 모니터와 같이 컴퓨터와 인간이 직접 교류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개인용 컴퓨터의 키보드로서 필자가 맨 처음 사용해 본 것은 삼성전자의 SPC-1000이었고, 그 다음은 애플 II 호환기종에 붙어있는 것들이었다. 1980년대 대부분의 초기 개인용 컴퓨터들이 애플처럼 본체에 키보드를 붙여서 판매했다. 삼성전자건 금성 패미컴이건, 그리고 대우전자의 MSX 기종이건 말이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게 불편해서 처음부터 떼어놓고 썼다. 애플 키보드가 본체와 연결되는 것은 단순히 8핀짜리 리본 케이블을 통해 8핀 DIP IC 소켓에 꽂아 넣는 형태였기 때문에 그저 키보드가 있던 공간을 통해 그 케이블을 밖으로 뽑아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얼마 후 IBM PC 기종이 나오면서 키보드는 드디어 본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일은 애플 II의 클론인 프랭클린(Franklin) 기종인 ACE 2000도 자연스럽게 분리형(Detachable) 키보드를 달고 나왔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애플 II 오리지널보다 나은 점을 부각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아무튼 그 이후로는 애플이건 혹은 또 다른 컴퓨터 업체건 모두 개인용 컴퓨터에는 분리형 키보드가 당연한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삼성 컴퓨터와 애플 컴퓨터를 몇 년 동안이나 사용하면서도 키보드의 질에 대해서는 감히 불평할 생각을 못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IBM PC/AT 오리지널 모델을 사용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의 충격은 바로 ‘키보드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라는 점이었다.
그때 사용했던 키보드는 기계식 스위치를 사용한 것이어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고 내부에 철판으로 둘러싼 구조 때문에 그 두께와 무게가 만만치 않은 것이었지만, 당시 필자의 취향에는 꼭 맞는 물건이었다. 아마도 그때까지 사용하던 다른 키보드의 흐리멍텅하고 불규칙한 느낌 때문에 키가 정확히 눌린다는 명쾌한 감각이 좋았던 것 같다.
최초의 PC 키보드는 83키짜리였다. 곧바로 84키짜리 키보드가 나왔지만, 이 키보드들은 오늘날의 키보드에 비해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우선 숫자 입력을 위한 키패드의 글쇠들을 커서키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숫자를 치려면 [Num Lock]키가 눌려 있어야 했고, 문서 위에서 커서를 옮겨 다니려면 그걸 다시 한 번 눌러줘야 했다.
게다가 [Num Lock]이 눌려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방법마저 없었다. 그나마 얼마 뒤에 [Numb Lock]키에 조그만 LED가 하나 내장돼
누를 때마다 LED가 켜졌다 꺼졌다 하는 방법으로 개선이 이뤄지긴 했다. 그리고 또 [Num Lock]과 함께 [Caps Lock], [Scroll Lock] 버튼들이 눌렸는지의 여부를 알려주는 세 개의 LED를 따로 위쪽에 표시해주는 키보드도 모습을 나타냈다.
이들 초기 키보드의 또 다른 큰 특징은 [F1]에서 [F10]까지의 기능키들이 주 자판 위쪽이 아닌 왼쪽에 2열 종대의 세로로 배열돼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좌우 [Shift]키들도 너무 작았다. 또 다른 한 가지 문제는 엔터키였는데, 이것이 수평방향이 아닌 수직방향으로 배치된 직사각형 모습이었기 때문에 엔터키 치면서 실수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모두 개선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101키짜리 키보드로서 이른바 ‘Enhanced Keyboard Layout’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 키보드는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키보드 형태를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향후에 윈도우 키와 메뉴키 등이 추가되면서 현재 표준이
된 104키짜리 키보드로 확장됐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에 한/영 전환키와 한자 변환키가 추가되면서 한두 개씩 글쇠가 더 많아진 것들이 사용되고 있기는 하다.
그 이후 키보드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모습의 키보드들이 선을 보였다. 본질적으로 색다른 것은 없었지만 그 가운데 급진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내놓았던 내추럴 키보드 정도이다. 왼손용 키들과 오른손용 키들을 따로 분리해서 ‘V’ 문자 모양으로 배열시킨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양의 문서 타이핑을 하는 사람들은 좋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처음에 힘을 좀 받는가 싶더니 지금은 그 인기가 시들해진 것 같다.
필자도 한때 사용해 본 적이 있지만, 살다 보면 일만 하는 게 아니라 게임을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꽤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한편으로는 독수리 타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불편하기 그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 반면 노트북의 키보드는 그나마 다양한 형태가 공존하고 있는 분야이다.
키보드 자판의 배열을 바꾸려는 시도도 있었다. 영어권에서 시도됐던 것이 기존 QWERTY 방식 배열을 드보락 배열로 바꾸려는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기존의 2벌식을 3벌식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물론 두 가지 시도 모두 대세를 바꾸진 못하고 힘을 잃었다.
기존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반짝 아이디어를 적용하는 키보드는 항상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필자를 즐겁게 했던 것은 마치 휴대폰의 키패드처럼 키보드 자판 전체에 백라이트를 만들어 넣은 것이었다. 물론
자판을 완전히 외고 있기 때문에 키보드를 전혀 보지 않고도 300타 이상 쳐댈 수 있지만, 방의 불을 껐을 때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모니터만 빛나지 않고 옵티컬 마우스와 함께 키보드가 은은한 백라이트를 발산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면 필자가 왜 즐거워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것으로는 신디사이저의 피아노 건반을 컴퓨터 키보드 아랫쪽에 일체화시킨 제품도 있고, 아예 둘둘 말아서 휴대할 수 있게 만든 키보드도 있으며, 백화점에서 사용되곤 하는 카드리더 내장형 키보드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선을 없앤 무선 키보드도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최초의 무선 키보드가 IBM의 실패작 가운데 하나인 PC 주니어 (PCjr)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현재 필자가 쓰고 있는 키보드는 컴팩 PC와 함께 공급된 것이다. 아들 녀석의 PC에서도 모델은 다르지만 컴팩 로고가 붙은 키보드가 붙어있다. 물론 챙길 수 있었던 키보드들 가운데 가장 괜찮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들과 함께 따라온 본체들은 대부분 퇴역했거나 어디에 가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브랜드 로고가 찍힌 이것들은 필자가 조립한 PC에 물려 아직도 왕성한 동작을 하고 있다.
필자가 키보드에 대해 좀 민감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더 민감한 사람들도 많고 더 감이 좋은 키보드를 위해 10만원 이상씩 투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아무 생각없이 구입한다면 5000원짜리 신품도 있고 대부분은 1만원 내외에서 해결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필자처럼 문서 작성을 많이 하는 사람이나 코딩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로 중요할 수밖에 없을 듯싶다. 인터넷 상에서는 키보드 매니아 사이트도 찾아볼 수 있었다.
별로 좋은 키보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사용해온 키보드에는 애착이 간다. 그래서 몇 년에 한번씩은 키보드를 세척하곤 한다. 며칠 전에도 키보드를 세척했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키보드가 비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 키보드를 완전 분해해서 씻은 뒤에 잘 말린 후 다시 조립했다. 물론 잘 동작했는데 문제라면 고무 스프링 가운데 두 개를 분실하는 바람에 전혀 쓸 일이 없는 [PrintScrn/SysRq]키와 [Pause/Break]키를 실제로는 동작하지 않게 뚜껑만 씌워두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조강지처같은 키보드인 걸. CPU와 마더보드와 하드디스크는 쉽게 업그레이드해도 키보드는 그렇지 않다. 맘에 맞고 몸에 맞는 키보드는 돈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