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아무리 힘을 다해 뛰어올라도 그 포도에는 입이 닿지가 않았다. 결국 포기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은 여우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저 포도는 어차피 맛이 시어서 따봤자 먹지도 못했을거야.” 여우는 이렇게 뇌까리며 미련없이 포도밭을 떠났다. 여우는 나중에 다른 포도밭에서 키가 낮은 포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얼마 뒤에 늑대가 포도밭에 와서 여우가 봤던 바로 그 포도를 발견했다. 입맛을 다시며 여우처럼 뛰어올라봤지만 늑대도 마찬가지로 포도에 입이 닿지 않았다. 여러번 시도한 끝에 지쳐버린 늑대는 포기하고 포도밭을 떠나가지만 조금 가다 돌아서서 미련이 남은 듯 되돌아보기를 거듭했다. 집으로 가던 늑대는 다른 포도밭을 지나치면서도 아까 따지 못한 포도 생각만 했다. “그 포도는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좋은 포도일거야. 다른 포도는 싫어.” 다음날 늑대는 처음의 그 포도밭에 다시 나타나서 또 제자리 뛰기를 하며 포도를 먹으려 했지만 똑같이 실패했다. 그 뒤로도 늑대는 거의 매일같이 들러 포도를 따려고 했지만 한번도 성공을 하지 못했다. 일주일 뒤, 포도밭에 온 늑대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그 포도를 따먹은 것을 발견하고 이제서야 완전히 포기를 해버렸다. 할 수 없이 이제까지 항상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다른 포도밭에 가서 아쉬운 참에 그거라도 먹으려 했지만 그것 역시 이미 다른 짐승이 먹어버린 뒤였다. 늑대는 결국 포도를 하나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실제로 그 포도의 맛이 어떤지는 늑대도 여우도 알 수 없었다. 둘 가운데 하나는 그 포도를 맛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하나는 처음엔 맛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나중엔 맛없을 것에 틀림없다고 마음을 바꿨다. 결국 둘 가운데 아무도 그 포도를 먹지 못했다. 과연 포도는 맛있었을까 아니면 맛이 없었을까. 먹지도 못했고 이제 존재하지 않으므로 먹을 수도 없었으므로 그것의 맛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포도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한 바가 다 맞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여우의 기억에는 신포도로, 늑대의 기억에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로 남을 것이다. 그 둘 다 정답이다. 하지만 여우의 마음 속에는 그것이 신포도였다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고 결국은 다른 맛있는 포도를 먹었다는 승리감이 남아있을 것이고, 늑대의 마음 속에는 맛있어 보이는 포도도 남에게 뺐겨버리고 맛없어 보이는 포도 역시 남이 선수쳐서 먹어버렸다는 패배감이 가득 차 있으리라. 제3자의 눈에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이처럼 진실은 최종 결과가 가려주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