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트리겔이란 영국 작가가 2004년에 쓴 데뷔소설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이처럼 심리 묘사와 표현력이 뛰어날 수가 있을까. 데뷔소설 치고는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다. 소설가가 여성적이라고 느껴질만큼 세밀한 표현과 섬세한 감성이 보인다. 남자의 감성이 섬세할 때는 여성의 것과는 달리 날카롭고 냉철하다. 여성의 감성이 여름날 석양을 보는 것 같다면, 남성의 감성은 겨울 하늘의 태양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책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주인공 A는 점차 남자끼리의 우정,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성과의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좋은 평가 등을 막 누리기 시작한다. 태어나는 과정마저 불편했고, 추억을 만들어갔어야 할 어린 시절은 더욱 불행했던 주인공 A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맛보기 시작한 행복이 그려지는 것은 책을 3분의 1쯤 읽었을 때였다. 그 시점의 모든 것들이 A로서는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것들이다. 그에 따라서 책을 읽는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이 책의 주인공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굴절되어갈지에 대한 대략적인 사전지식이 있어서였다. 예전의 나는 조금이라도 행복함을 느끼는 시점엔 혹시나 다시 불행한 상태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함께 느끼곤 했다. 그것이 나의 실제 생활이 아니라 영화 속 장면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어린 시절 오금이 저리던 시간들 가운데에는 당연히 불행스러운 결말이 될 상황을 앞둔 순간들이 있었다. 비디오테입이나 DVD, 혹은 컴퓨터를 통해서는 가능했던 일시 정지 기능이 그 당시 TV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기능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읽는 도중 덮고 심호흡을 하고나서 계속 읽어나가던지 그만 두던지 결정할 수 있지만 어릴 때 보던 TV 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TV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주인공이 악당에게 붙잡히게 될 것 같으면 그 직전에 난 벌써 방으로 들어가 귀를 막고 이불까지 뒤집어 쓰고 그 장면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충분히 시간이 흘렀다고 확신이 든 뒤에야 살짝 방문을 열고 정말 그 장면이 끝났는지 확인한 뒤에 거실로 나가 TV 를 다시 보기 시작하곤 했다.
그런 옛 기억과 비슷하게, 그가 처음으로 누리기 시작한 행복한 몇개월 부분을 읽으면서 위태로움도 함께 느끼는 불안한 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책을 덮고 그만 읽으려 했다. 하지만 다음날 집어 들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계속 마음이 불편했고 이제 그만 읽을까 말까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끝까지 다 읽고 말았다.
“보이 A” 는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으로 그려낸 어둡고 슬픈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A라는 주인공에 대해 차갑고 냉정할 정도의 깔끔함과 객관성 있는 묘사를 하고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책을 읽으며 느끼는 감상이 더 서글퍼진다. 읽으면서 계속 스믈거리는 불편한 마음, 그러면서도 계속 읽어나갈수 밖에 없는 책이다. 애초에 책을 집어들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괜찮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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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몇마디 말도 의미심장하게 들리고 내가 하고픈 말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자연은 빈 곳을 싫어하죠.” 아내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의 몸은 특히나 비어 있는 공허함을 싫어했다. 남자보다는 여자의 몸에 공간이 더 많고 따라서 채워져야 할 빈 공허함도 많았다. 신체적인 욕구의 공허함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공허함까지도 채워줘야 했다.
“(감옥에 오래있다보니) 여자가 그립다. 꼭 섹스 때문만이 아니라 여자들의 세심함과 웃음소리가 그리워. (남성잡지의 여자 누드) 사진에는 그게 없잖아.”
소설 속의 다음 한마디로 많은 내용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은 전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소설에선 감옥에서 세월을 보낸 사람의 넋두리지만, 이건 내가 살아온 수십년의 세월 뒤에 느끼곤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 세월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세월이 행복했건 괴로웠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