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과는 좀 상반된 이미지겠지만 난 또한 달빛이 환히 비쳐내리는 밤의 포근함과 차분함을 좋아하며 그에 따른 환상도 가지고있다. 그냥 밤이 아니라 맑은 밤하늘에 달이, 특히나 보름달일수록 더욱 좋은 그런 달빛이 지상을 고루 덮어주는 모습이다. 눈이 쌓인 시골 마을에 하얗게 떠있는 달, 그리고 그 밑의 산과 들과 집들이 모두 조화롭게 어우러져있는 것은 단순히 상상 속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시골에 집짓고 살면서 몸소 체험했던 현실이었다. 그건 아파트와 상가와 빌딩이 사방을 둘러싼 대도시에서는 전혀 만들어질 수 없는 영상이지만 달빛의 환상은 눈이 내리지 않아도 철을 가리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볼 수있다.
어느 시인은 눈오는 밤에는 먼곳에서 여인의 옷벗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지만, 내 환상 속에서는 눈 대신 달빛이 사방에 쏟아져 내려와 쌓여있는 듯한 분위기가 에로틱한 또다른 이미지를 연출한다. 여인의 몸이 창을 등지고 앉아있을 때 창밖에서 뽀얗게 들어오는 달빛은 역광의 효과를 통해 실루엣을 만들어내고 그 얼굴의 동그란 뺨의 곡선이 만든 경계선에는 얇게 반사된 빛의 선이 형성된다. 그 곡선은 뺨에서 목선을 타고 내려와 맨살을 드러낸 어깨로 미끄러져 내려가서는 다시 다시 팔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그린다. 역광을 받고 있기에 여인의 몸은 세부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실루엣을 통해서만 자태를 보여줄 뿐이다. 그 곡선은 다시 허리로 옮겨가서 둥그런 둔부를 빙글 돌아 살짐이 넉넉한 허벅지를 타고 발끝가지 내려가는 이미지가 비친다. 이것이 달빛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환상적이고 약간은 에로틱하다고 할 수 있는 이미지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눈에 관한 환상 이미지가 있었다. 어떤 절박한 상황, 정말로 생존을 위해 내가 낼 수 있는 힘의 100% 아니, 120% 을 써가며 몸부림치는데 도저히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상황이 떠오르곤 했는데 그것은 항상 눈쌓인 하얀 벌판이 배경이었다. 사방은 온통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눈이 쏟아지고 있는 벌판에 나는 혼자 서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커다란 눈송이들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나는 왜 거기에 서 있게 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이런 영상은 비극적이면서도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아래 대목은 그런 환상에 대해서 거의 20년전에 썼던 내용이다. 지금은 환상 이미지가 자주 떠오르진 않지만 예전엔 여러번 비슷한 느낌의 꿈을 꾸거나 몽상을 하곤 했었다.
눈보라 속에서 가야할 방향도 모르고 목적지도 모른채 방황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눈속에 사람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누굴까 싶었는데 그것은 곧바로 커다란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바람을 탄 듯 내쪽으로 엄습해왔다. 내 손에는 어느새 총이 들려 있었고 난 넘어지면서 괴물을 향해 총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괴물은 바닥으로 흔들리며 쓰러졌다. 그러면서 눈보라는 일시에 멈추었다. 순식간에 구름 한점없는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은 작은 평지에 넘어져 있었다. 산들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내가 넘어져있는 땅에도 눈이 쌓여있었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일어섰다. 앞쪽에 다른 사람이 넘어져있었다. 새빨간 피가 눈을 적시며 녹이고 있었다. 넘어져있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여자였고 그녀의 눈물이 샘솟듯 흘러서 관자놀이를 거쳐 귓가에 맺혔다. 그렇게 고였다가는 이윽고 눈 위로 떨어지면서 흰눈을 녹였다. 하늘은 더할 나위없이 새파랬고 그 아래로 세상은 눈이 시리도록 희었다. 눈속에 고인 그녀의 붉은 피는 그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녀의 죽음은 그처럼 아름다웠다. 사방을 둘러보면 길도 없이 눈에 쌓인 세상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난 여전히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고 뭘 해야할지도 몰랐으며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채로 고립되어 있다.
나의 이런 환상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짓기 힘들다. 첫번째 태양은 정열적이고 원초적인 느낌을, 두번째 달빛은 차분하고 안정된 에로틱한 분위기를, 그리고 세번째의 눈보라 속의 비극은 어찌 할 도리 없는 절망적인 한계 상황을 각각 느끼게 해준다. 사실 이것들은 서로 연관되진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상관없다. 서로를 연관시킬 필요도 없고 일일이 해석해보겠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저 알 수 없는 나의 내면의 세계를 살짝 엿보게 해주고 있는것이겠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이 하나 둘 모여서 내 머리 속의 복잡다단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있으리라. 그 결과가 이렇게 엉뚱하나마 살아 숨쉬고 있는 ‘나’라는 인간이 되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