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마취주사의 약효가 남아서일까, 아니면 오전에 그 어금니의 신경치료를 받은 덕택일까. 오늘은 오후 5시가 되도록 전혀 통증이 없다. 어제 새벽 일찍 치통때문에 잠을 깨서 고생을 했고, 오후 늦게부터 다시 시작된 극심한 통증에 어쩔 수 없이 치과 문을 닫기 30분 전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그 뒤로 저녁 식사를 하고나서 시작된 통증은 타이레놀 두 알을 먹고 밥 늦게 또 다시 두 알을 먹었어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간신히 잠이 든 것은 새벽 3시쯤이었을까, 그래도 그때부터 치과 개업시간인 9시 반까지의 통증은 그나마 참을만 했다. 예전엔 이렇게 이가 아팠던 것이 치과에서 이를 뽑을 때와 신경을 건드릴 때 뿐이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아도 예전의 그 정도의 고통이 한참동안 지속되었다. 혼자 방에 앉아서 혹은 누워서 턱을 감싸쥐고 끙끙 소리를 내며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다 나이들어가는 한 과정인가보다. 사십대에 들면서 내 주위의 다른 이들이 다들 겪기 시작하는 노안 현상, 그것은 그저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애써 외면할 수 있었다. 아직은 심히 불편해할만큼은 아니었기에 아직은 괜찮다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머리숱이 더욱 적어지는 것도 그랬다. 남들이 나를 볼 때만 관련된 것일 뿐이고 나 스스로는 여전히 제멋에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살랑거리는 실바람에 가볍게 머릿결이 날리는 즐거움을 이마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체력이 약해지거나 근력이 줄어드는 것도 그리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고 운동으로 보완할 수 있을만 했다. 그처럼 다른 것들은 모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어 천천히 진행되는 노화현상이었기에 익숙해지는 데에 연착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치통 사태는 너무 급작스러웠다.
내 치아가 차거나 뜨거운 음식, 신 맛에 민감해지는 것은 이미 얼마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그리 심하지도 않았고 어리거나 젊을 때에도 항상 치아의 건강은 문제가 생기는게 흔한 일이므로 다르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치과 의자에 누워서 하는 생각도 달랐다. 앞으로 다른 치아들도 이런 문제를 하나씩 가지기 시작하겠구나 싶었다. 점차 금으로 덮어씌운 이들이 많아지겠구나 생각도 들고 지금의 내 부모 정도의 나이가 되면 또 잇몸도 망가질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훨씬 높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이번 치통은 심각했다. 정말로 너무나 아팠다.
다른 한편으로는, 젊고 건강한 시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혹사시킨 부분이 먼저 망가지는구나 싶기도 했다. 나는 내 몸을 그리 심하게 다루진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만,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더 건강하다고 느꼈던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2.0까지 측정될만큼 뛰어났던 시력을 자신해서인지 책과 TV와 영화, 특히나 컴퓨터 등을 통해 눈을 혹사했던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지금의 노안 현상이 좀 더 많이 찾아온게 아닐까. 치아도 그랬던 것 같다. 소주병을 이로 따는 치아 학대 차원의 만용 같은 것을 부릴 기회 따위는 없었지만 호두 같은 것을 이로 깨물어 부숴뜨려 알맹이를 먹는 것을 즐기기도 했고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동그란 뼈를 어금니로 깨물어 조각내는 것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차피 지금은 그럴 시도조차 하질 못한다. 여차하면 돼지뼈 대신내 어금니가 조각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이다. 치과에서 모니터 화면으로 본 내 오른쪽 위의 마지막 어금니는 중심을 거쳐 한쪽으로 다른쪽으로 금이 갔고 돼지뼈를 부술 만큼의 충격이 가해지면 거의 정확히 반토막이 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현대의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의료수준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인간의 평균 수명은 40대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20세 근처에 2세를 갖고 그 2세가 다시 애를 낳을 때 쯤의 나이가 그 정도가 된다. 생물학적으로는 그 정도로 충분히 생식과정을 통해 자손 번창을 이룰 조건이 될 것이다. 인간의 신체의 시계가 그 정도 쯤에서 노화현상을 보이게끔 DNA 속에 타이머 설정이 된 셈이다. 그래서 40세 이후의 인생은 어찌 보면 인간에게만 덤으로 주어진 여분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대의 인간들은 20세에 성인이 되어 자손을 낳는 것보다는 10년쯤 뒤로 그 시점을 미루는 것이 보편적이긴 하지만 몸은 그런 변화를 아직 인정하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이다. 몸의 노화를 극복하는 방법도 많아졌고, 퇴화되고 있는 능력을 보강해주는 문명의 이기도 많아졌다. 예전의 중년이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어진 것이다. 그런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나갈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졌다. 이를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노화현상에 익숙해지면서 그걸 인정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어쩌면 나는 그런 익숙해짐을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예전보다 병원을 덜 꺼려하고 그 안에서도 덜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오늘 시작한 신경치료를 앞으로 몇번 더 받아나가야 할텐데 내 마음가짐은 10년전에 한번 그 과정을 치뤘을 때보다 더 가볍고 긍정적이다. 어제밤처럼 아픈 것에 비하면 차라리 신경치료가 몇배 더 낫다는 결과론이기도 하다. 그래, 필요하면 남부끄러워하지 말고, 현실을 인정하면서 돋보기 안경을 쓰면 되지 않겠는가. 어릴때 근시 안경 안 쓰고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만하면 크게 복받은 셈이다. 내 몸엔 아직 튼튼한 곳이 훨씬 더 많으니, 조심조심 몸을 써 가면서 알찬 사십대를 살아가고 또 그 이후에 대비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이듦에 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더욱 지혜스러움을 느낀다. 그놈의 징그러운 치통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