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한달 반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온 지난 일주일은 그저 덤덤한 느낌의 날들이었다. 하긴 겨우 한달 반에 불과한 외국 체류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캐나다에서 9개월 동안 지낸 뒤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국에 돌아가기 싫어서 발버둥치는 심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영어로 떠드는 캐나다에서, 태국어로 떠드는 치앙마이에서, 그리고 한국말이 들리는 이땅에 와도 별로 달리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한국사람들이 이른바 조국, 혹은 고국이라며 그리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에 와서 느끼는 감회는 고향의 느낌은 아니었다. 한국보다는 오히려 맛있는 것 많고 골프도 맘껏 칠 수 있었고 마사지를 시원하게 받을 수 있었던 태국이 더 그리운게 지금의 느낌이다. 그리고 태국보다 더욱 더 그리운 것은 태국도, 한국도, 그리고 캐나다 같은 국가의 구분이 아니었다. 내 가족이 있는 곳, 한국이건 태국이건 캐나다건 내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으며 내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다 최고의 그리움의 대상인 고향이 되는 것이다.
‘내 고향 남쪽 바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고향 고향 내 고향 박꽃 피는 내 고향…’,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노래들은 이상하게도 나의 향수를 자극한다. 내가 어린시절에 바닷가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었고 두메산골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고 강변에 살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갑자기 뭔가가 그리워진다. 그런데 만약에.. 만약에 한국의 산 속이 아닌 미국의 산 속에 꽃피는 어느 동네에 집을 지어놓고 거기가 고향이네라고 말한다면 그곳도 그리워지고, 아련한 향수도 느끼게 될까? 한국 땅이 아니니까 그건 가짜야!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이런 것에는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없다고 본다. 내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뭔가 있다면 그게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그 노래가 한국 노래이므로 한국 사람이 한국의 어느 지역을 그리워하는 것만이 정당한 사용법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고향은, 그리고 그리움의 대상은 내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의 고향을 그리는 노래들에서는 엄마, 아빠, 형제 자매, 어린 시절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내 아내나 남편, 내 자식들을 그리워한다는 가사는 없다. 그렇다면 이 노래들은 모두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노래, 그들만이 부르는 노래인 것일까. 내 가족의 범주는 미혼의 경우라면 부모와 헝제자매들이겠지만 기혼자라면 배우자와 자식들이 내가 함께 하는 식구일 수 밖에 없을텐데 말이다. 물론 옛날 같으면 여자들이 시집을 가면서 고향이나 친정을 떠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볼 수도 있었겠다. 그렇다면 남자들이 이 노래들을 부르거나 들으며 향수를 느끼는 것은 또 뭔가. 아내와 자식들이 함께 하는 단란한 가정이라는 개념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예전에 외국에 나가 사는 일이라고는 나라가 망해서 만주 벌판을 떠돌거나, 전쟁에 패해 볼모나 노예로 끌려갔거나, 혹은 징용당해 강제로 탄광에 끌려가 뼈빠지게 일해야했거나, 돈을 벌기 위해 광부나 간호사로 먼 나라에 갈 수 밖에 없었던 그런 분들에게는 정말로 가슴 저리게 그리운 것이 고향이었을 것이다. 나래도 그랬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펑펑 터져 나올 만큼… 하지만 요즘 시대는 변했다. 쇼핑하러, 관광하러, 업무상 외국을 드나드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가족 모두가 외국에 나가 함께 사는 것도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개념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꽃피는 산골’은 없어진지 오래다. 그래도 여전히 ‘꽃피는 산골’ 같은 노래들을 들으면 묘한 그리움, 아련한 향수가 자극된다.
나도 그런 노래를 들으면 마치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어떤 두메산골이나 바닷가 마을인것 같은 착각이 들긴 한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곳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부모형제도 없고 어린시절 친구들도 없다. 그래도 그리움은 든다. 어쩌면 그런 그리움의 이유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년기를 그리워하는,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공통적인 심리라는 것이다. 고향이라는 장소가 구체적으로 그런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보다는, 우리의 부모 세대들의 대다수가 유년기를 보낸 장소가 그런 곳이었던 것이고, 우리 세대에게는 마치 감정의 이입이 되는 것처럼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우리들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상징적인 공간을 대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살아있기에, 인간이기에 마치 본능처럼 느끼는 그런 그리움인 것이다. 이미지로만 만들어진 고향이 그런 그리움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난 고향이 그립다. 그런데 그 고향은 한국이 아니다. 그렇다고 태국이나 미국이나 캐나다라는 국가로 딱 규정지을 수도 없다. 어느 곳이건 상관없이 내 가족들,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그곳이 난 고향처럼 그립다. 한국의 어느 시골 동네건, 태국 치앙마이의 무반이건, 캐나다의 작은 도시건, 미국 서부의 아파트건 상관없이 난 내가 가족을 떠나 다른 곳에 몇주일씩, 몇달씩 묶고 있으면 그곳이 그리워진다. 가족이 그리워지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새로운 고향이 되는 셈이다. 물론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곳은 어디다라고 지정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에게 있어 고향은 바로 가족이다.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그 고향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