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며칠간 수험생 생활을 해왔고 그렇게 공부한 내용의 시험을 오늘 오전에 치룹니다. 어떤 시험인가 하면 “Real Estate Investment Analysis” 이라는 것이네요. 문자 그대로 번역을 해보면 “부동산 투자 분석” 쯤 되겠지요. 이미 부동산 중개인 (리얼터) 자격증이 있어서 그 일을 하고 있는데 또 무슨 시험을 봐야하는거냐고 묻는 분도 계시던데 그게 일반 리얼터를 계속 하는 데에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닌데 아내는 부동산 브로커 (Broker) 자격을 따기 위해서 선행 조건으로 몇가지 과목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공부하고 시험을 봐야 하는데 이 부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적지않게 어려워서 리얼터 지망생들 가운데에는 일종의 기피 과목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수학적인 내용이 많으니까 더 그런가 봐요. 하지만 아내는 다른 쉬운 과목도 있지만 그냥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만이 아닌, 나중에 리얼터 및 브로커 일을 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는걸 골랐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자신이 예전에 시도해서 합격했던 미국 회계사 (CPA) 시험의 내용과 관련된 부문이 있어서 이왕이면 그걸 보완하는 차원이 되기도 한답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아내,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 새로운 직업을 찾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아내…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결혼 20여년을 하면서 이런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내는 원래 공부와는 거리가 다소 먼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대학도 우여곡절 끝에 원하지 않는 후기 대학, 원하지 않고 취직도 거의 안 되고 무엇을 배우는지 전혀 모르던 학과에 가게 되는 상황이었다지요. 어쩌면 그래서 졸업식과 함께 1주일만에 저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던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업주부로 취업을 하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대입 시험에서 영어는 애초부터 포기했던, 요즘말대로 ‘영어울렁증’ 환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파견근무를 떠난 미국 시애틀에서 신혼생활을 하면서 아내가 집에서 혼자 워낙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워싱턴 주립대의 ESL 코스에 집어넣었습니다. 성적이나 언어 능력 배양에 대한 기대는 별로 안 했고 그냥 국제적으로 다양한 친구들도 사귀고 기본적인 회화나 배우라는 것이었는데, 이 사람이 그만 우등상을 받고 조기 수료를 해 버리더군요.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부터 영어는 아예 포기한 사람이라더니..?” 라고 했더니 자기도 어찌 그리 됐는지 잘 모르겠다더군요.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조용히 살았습니다. 참, 나중에 영어 TOEIC 시험을 본 적이 있는데 영어 포기자였던 이 사람이 930 점을 받았다는…
다시 4년이 흘렀습니다. 이번엔 제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또 미국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어요. 이번엔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실리콘 밸리였습니다. 이때는 첫 아이가 있던 때이기도 하고 아내도 영어를 할 수 있었기에 제가 출근한 동안에도 심심할 일 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었는데 회사의 중국계 2세 동료가 집에 저녁초대를 해서 부부동반 방문을 했더랬죠. 그 친구 이름은 Greg 였습니다. 그의 아내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어느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하고 있었고 곧 CPA 자격 시험을 볼 것이라더군요. 아내는 문득 호기심이 들었는지 그게 어떤 것이며 그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자세히 물어봤습니다. 그리곤 1년반이 지나서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그에 대해선 아무 얘기도 없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서 아내는 갑자기 미국 회계사 자격을 따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마침 미국 CPA 자격을 따는 열풍이 몰아닥친 때와 맞아떨어져서 그걸 강의하는 학원도 있었거든요. 심심한가보다 싶어서 열심히 도왔습니다. 4년제 대학의 회계 관련학과를 졸업했거나 해당 과목들을 수강해야하는 조건이 있는데 아내는 도서관학과 출신이었기에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또 통신강의를 들어야했고 주말에는 내내 출석강의를 들어야했습니다. 저는 주말에는 첫째 아이를 돌봐야했는데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롯데월드 연간 회원권, 용인 에버랜드 연간 회원권을 다 구입해서 주말마다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지요. 그러다보니 아이가 그런 놀이공원에 가는걸 지겨워하는 상황까지 되었다는….
아내는 1년만에 시험에 필요한 자격요건을 다 갖추고 또 미국령 Guam 섬에 가서 시험 다 치루고 한번에 합격해 버렸습니다. 그리곤 모 회계법인에 취직이 되었는데 일이 너무 힘든 것까진 그렇다쳐도 주말까지 매번 출근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면서 유치원 다니는 아들래미 얼굴도 제대로 보지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려서 그만 때려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주말이 보장되는 다른 작은 일반 회사에 취직을 했지요. 그 회사는 1년쯤 뒤에 문을 닫아버려서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전업주부가 되었습니다.
세월은 또 흘러가고.. 우리 가족은 서울 동쪽 양평 산속에 집을 지어 이사를 해서 4년을 살고 다시 태국 치앙마이로 이주해서 또 2년을 살고 캐나다로 옮겨옵니다. 영주권을 받고 집을 사고.. 아내는 미국 회계사 시험을 패스했던 것이 뭔가 캐나다에서 직장 얻는데에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별로 그렇진 않았습니다. 또 다른 절차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그냥 조그만 회계법인에 취직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캐나다 내의 학교에서 과정을 이수해야할 필요가 있어서 1년 과정을 약 석달동안 해결해주는 속성 코스를 팬쇼 컬리지에서 수료한 뒤에나 가능했지요. 그런데 이때에도 참 쉽게 공부를 하더군요. 물론 제가 그렇게 얘기하면 자신은 머리 싸매고 코피 터지게 공부했다고 말하지만 제 눈에는 그냥 슬슬 해나가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 회사에서 1년쯤 일을 하고 제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걸 돕기 위해 거길 그만 두고 나서 다시 얼마 안 되어 아내는 리얼터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교제를 주문하고 강좌를 신청하고 바로 책을 파고 들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최단 기간 안에 합격을 해 버리더군요. 그 뒤에 한동안 비즈니스 전문 리얼터 회사를 좀 다니다가 현재의 리얼터를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 한동안은 거의 실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작년 말부터 일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올해 봄과 여름에는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저께 아내가 말하길 그날 완료된 거래로 올해 목표를 달성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혼자서 완료한 총 거래 성사건수가 48개, 대부분이 매매 실적이고 일부 렌트도 있고… 전에 아내가 그 목표를 얘기한걸 들은 적은 있었지만 저는 올해말까지도 해도 절대 목표 달성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아직 몇달이 더 남았는데 목표가 달성되었다는겁니다. 아내는 이제 60개로 목표를 상향조정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목표를 세웠습니다. 바로 브로커가 되는 것이죠. 왜 브로커될 필요가 있냐고요? 일반 리얼터는 반드시 어느 부동산 중개업체에 소속되어서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업체를 만들어서 운영하는 사람이 되려면 브로커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내는 1~2년 내 달성할 목표는 그런 회사를 세우는 것이라는군요. 아마도 런던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도시로 진출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저보고도 리얼터 자격시험을 보라고 자꾸 조릅니다. 함께 파트너로서 일을 하면 시너지 효과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저는 이제 뭔가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은 딴나라 얘기가 된 상태입니다. 어린 시절 대학교 입학 시험을 보거나 직장을 다니면서 온갖 발표를 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해외 출장을 다니던 그런 생활은 몇 세기 전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공부에는 젬병이 되었습니다. 공부 비슷한 것을 하려고 책을 읽다보면 같은 줄만 읽고 있습니다. 시험을 봐야지 생각하기만 해도 하늘이 노래집니다. 아내는 그 반대가 된 것 같습니다. 어릴적에는 공부와 담을 쌓았다가 나이가 들면서 공부가 쉬운 사람, 시험이 두렵지 않고, 새로운 일들을 재미있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부부의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보다라고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밥짓고 설겆이하고 아이들 도시락 싸주고 집청소하고 멍멍이 산책 시키는 아침 시간을 보낸 다음에서야 제 비즈니스 업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잘 하는 일을 하는게 맞겠지요.
아내가 공부하는걸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주절주절 적다보니 참 얘기가 길어졌군요. 아무튼 다른 영어울렁증 환자 또는 이른바 ‘영포’하셨다는 분들도 포기하지 마시기를.. 그리고 대기만성 혹은 Late Bloomer 일 경우도 많습니다. 한국에서 낙제생이던 사람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서 우등생이 되는 모습을 직접 본 경험이 많습니다. 혹은 캐나다에 오셔서 자신의 소질을 새로 발견하게 되실 수도 있구요. 또 한가지.. 이런 일은 여성 분들에게 훨씬 더 많이 벌어진다는 사실! 모두에게 건투를 빕니다. 그리고.. 오늘 시험보는 아내가 결혼 이후 이제껏 그래왔듯이 한방에 패스해 버리고 다음 최종 시험으로 전진해서 브로커 자격을 따고, 그와 함께 올해 목표 건수인 60 개 달성을 하는 것도 조용히 보고 있을랍니다. 그리고.. 회계사, 리얼터를 거쳐서 다음엔 또 뭐가 될라고 할까.. 싶어서 그것도 함께 보고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