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람들은 서울, 그 속에서도 테헤란로를 정보통신 기업과 벤처 기업의 보금자리로 말하기도 했었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대전의 대덕 연구단지도 있고 또 서울의 끄트머리에 아주 작은 업체들이 어쩌다보니 옹기종기 한데 모이게 되었던 소위 포이동 밸리라는 곳이 있긴 했지만 테헤란로의 상징성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테헤란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자리한 개포동과 삼성동, 역삼동 등의 주소가 명함에 찍히지 않고서는 잘나가는 벤처기업이 아니다라는 과시성이 진하게 스며든 믿음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테헤란로는 금융권 기업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곳을 근거로 삼았던 많은 중소 IT 기업들은 서울 전역으로 퍼져간 상태이다. 새로 단장을 하여 테크노타워니 벤처타워니 하는 이름의 빌딩이 여기 저기 세워진 옛 구로공단 자리로도 꽤 많이들 이주를 했다. 그밖의 다른 지역에도 그렇게 집단적으로 IT 업체들이 밀집된 빌딩이 꽤 여럿 생겨났다. 디지털단지니 미디어단지니 하는 식의, 급조했거나 약간은 억지스러운 이름을 가진 채로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 지역적인 중심은 서울이다. 대덕 연구단지는 조성된 지 수십 년이 됐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그 규모나 업체 수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일산이나 수원 등지에도 적지 않은 업체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비록 행정구역상으로 서울특별시에 들어가 있지 않더라도 그 또한 범 서울권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 그들 지역에 몇몇 업체들과 일을 하면서 들었던 것은 그들도 성공해서 돈 많이 벌면 서울 특정 지역으로 입성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서울을 소재지로 한다는 점은 중요시되어 왔다.
필자가 10년쯤 전에 근무하고 있던 우면동의 대기업 연구소에서는 한때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장차 대덕 연구단지로 이전을 한다면 찬성하겠는가, 아니면 반대하겠는가? 결국 이전을 하게 된다면 회사를 따라 이주하겠는가, 아니면 직장을 그만두겠는가?
그 당시 결혼하여 자식을 두고 있는 중견 연구원들은 그래도 절반 정도는 찬성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미혼 또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구원들 경우에는 대부분 반대의 의견을 냈고, 더구나 그 중 상당수가 실제 이전 시에는 직장을 옮길 것을 고려하겠다고까지 말했다. 물론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리라고 보지는 않지만 그만큼 서울권을 벗어난다는 점에 대해서 거부감이 컸던 것이다.
특히나 젊은 층에서는 문화적인 풍요로움과 대외적인 활동의 범위, 그리고 서울에 근무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만족감 등의 이유가 컸다.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건 또 다른 이유에서건 그 연구소는 아직도 그때 그 자리에서 비좁은 공간과 교통난 같은 주변 여건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하고 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오늘의 세상은 꽤 달라진 듯하다. 두 달쯤 전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터넷 기업 중 하나인 다음이 제주도로 본사를 이전하는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물론 아직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테스트를 진행하여 2006년에 최종 결정을 하겠다는 내용이긴 하지만 회사의 지명도와 규모, 그리고 그에 따른 파급효과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미 계획은 실행되어 16명이 근무를 시작했고 최근에는 38명 단위의 팀이 추가 이전하기로 되어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특별한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소식이다.
예전의 경우나 다른 기업들과 비교해 볼 때 다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회사가 순수한 인터넷 기업이라는 점이다. 주된 연구개발, 영업, 지원 등의 모든 활동이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같은 IT 관련 업종의 기업이래도 하드웨어를 만들거나 시스템을 구축하는 업체들은 물류 관련 업무가 적지 않다. 수시로 새로운 자재와 장비를 수급해야 하고 그의 조립과 테스트 등을 위해선 관련 협력 업체가 인근에 있어야 하며 해외 시장의 비중이 큰 경우라면 그런 점들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 다음의 경우는 인터넷 기업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가능한 것이다. 네트워크 인프라가 잘 구성되어 있기만 하면 무엇이 장애가 되겠는가.
인터넷 기업이 아닐지라도 이런 시도를 하고 있는 예가 있다. 필자의 친구 하나는 이른바 잘 나가는 반도체 칩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미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스타 기업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고 그 분야의 매출도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 친구가 꿈꾸는 그 회사의 미래의 모습은 바로 본사의 해외 이전이다.
인터넷 기업은 아니라도 칩 설계하는 일 자체가 워크스테이션으로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이다. 최종적으로 칩을 만들기 위해 전문 가공업체, 즉 FAB 업체로 설계 데이터를 넘기기 전까지는 모든 디버깅과 시뮬레이션이 컴퓨터 안에서 이루어진다. 칩의 생산은 한국 혹은 제3국에서 이루어질 터이므로 그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만 국내에 머무르면 된다. 그 친구는 그 꿈의 구체화를 위해 벌써 개인적으로 호주와 뉴질랜드에까지 답사를 다녀온 상태이다. 직원들의 반응은 어떻냐는 필자의 질문은 결과적으로 우문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러한 미래에 대해 환영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렇다. 이 또한 인터넷의 발전과 세계화의 공적이다. 제주도나 호주의 해변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개발을 진행하고 개발 말기에만 칩 가공업체에 출장 가서 마무리를 하며 해외 영업은 각국에 자리 잡은 현지 지사에서 수행하면 된다.
기본 업무는 모두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진행하고 필요한 물류는 택배 서비스를 활용하면 된다. 반드시 서울에서, 나아가서는 국내에서만 버티고 앉아 있을 필요는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충분히 자본이 있고 규모가 있으며, 발전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라면 기존 서울의 좁아터진 공간에서, 공해에 찌든 환경에서, 빽빽하게 막힌 도로와 지하철 속에서 직원들을 고생시키며 일 시킬 필요가 없지 않을까?
사실 규모가 작은 벤처기업들이나 인간끼리의 접촉을 많이 해야 하는 IT 서비스 업종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 나가도 문제없을 기업, 혹은 더욱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업이 상당히 많아진 게 사실이다. 10년 전의 모습과 오늘날의 상황은 기술의 발전 정도만큼이나 달라졌다. 그만큼 일하는 내용과 일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단순히 회사의 소재지를 옮긴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기보다는 이 새로운 시대에 그처럼 새로운 발상을 한다는 점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싶다.
그래서 다음이라는 회사의 다음 행보를 눈여겨보고 있다. 그리고 그게 성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10년 전의 하이테크 기업들의 모습,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지켜보며 10년 후의 그들은 어디에서 일하고 있을지 그 모습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