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녀가 사라졌다?

드림웍스 영화사에서 만들어 1편과 2편 모두 연속 히트를 친 슈렉(Shrek)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는 필자의 집에서도 인기가 높아 두 편 모두 DVD를 구입해 최근까지 각각 수십 번씩 감상해 왔다. 특히 아들내미가 그 음악을 좋아해 사운드트랙 CD는 차 안에 항상 비치해 최근까지 수시로 차 안에서 함께 듣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Holding out for a hero’라는 제목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 해석해 보자면 ‘영웅’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되겠다.

한편 이 영화의 제목은 주인공의 이름을 딴 것인데,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세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슈렉의 아내가 된 인물이 있다. 피오나 공주다. 그리고 이 영화를 틀고서 피오나 공주가 등장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필자의 머리를 한번씩 스치고 가는 이름이 또 있다. 그게 바로 피오리나, 즉 HP의 CEO, 아니 CEO였던 칼리 피오리나다.

왜 그 두 이름이 필자의 머리 속에서 함께 떠오르는 것일까. 우선 두 인물의 이름은 무척이나 유사한 편이다. 원어로 봐도 Fiona, 그리고 Fiorina로 표기된다. 전자는 공주였고 후자는 IT 업계의 여왕이었다. 또한 현재 각자의 세계는 궁전에서의 그런 직분을 벗어난 상태이기도 하다.

실제로 피오리나는 IT 업계에 대해 살피다 보면 아주 자주 접하는 이름이고 그만큼 중요한 인물인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필자가 과거에 몇 년간 HP에 근무하기도 했었고 그 때문에 다른 외국 기업들보다 HP에 대해 익숙하고 관심이 깊으며 그 행보를 자세히 살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칼리 피오리나가 지난 2월 9일 사임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외형적으로는 자진 사임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이사회에서의 결정에 의해 그 이틀 전인 2월 7일에 해임된 것이다. HP의 영업 실적이 목표치에 못 미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사실 피오리나를 CEO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결정은 벌써 여러 달 전에 내려졌다고 한다. 단지 명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 것뿐인 셈이다. 이제 HP라는 거대 항공모함은 가뜩이나 어려운 경쟁 국면에서, 한동안 수장없이 IBM이나 델 등의 기업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

약 6년 전에 루슨트 테크놀로지의 CEO에서 HP의 CEO로 자리바꿈을 했을 당시에 피오리나의 위세는 당당했다. 그런 소식이 전해진 당일, 루슨트의 주가는 1.87달러가 떨어지고 대신에 HP의 주가가 2.68달러가 올랐다는 점은 그 당시 피오리나의 영입의 영향력이 어땠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피오리나가 물러난다는 소식은 HP의 주가에 또 다른 방향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임발표 당일 HP의 주가가 7%나 상승해 21.53달러가 됐던 것이다. 결국 투자가들이나 기업 분석가들은 피오리나가 HP의 미래에 그리 좋은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도 피오리나 본인은 그다지 억울해 하지는 않을 듯 싶다. HP를 떠나면서 자그마치 2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게 되니까 말이다. 세금 등의 비용으로 얼마나 떼일지는 몰라도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나가는 형국이라 스타일은 구겼을 망정, 주머니는 두둑해 기분은 흐뭇해 할 수 있는 정도다. 물론 8백억 달러의 연 매출을 자랑하는 거대기업이니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HP의 현재 상황이 그리 밝지 못한 만큼,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눈길이 따듯하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나 HP 안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피오리나가 해임됐다는 뉴스를 사내 방송으로 듣고 있던 직원 중 일부는 환호를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박수는 안쳤더라도 ‘이제 마녀가 사라졌다’라는 대화 내용도 들렸다고 한다. 필자는 그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약 6년 전에 피오리나가 CEO로 발탁됐다는 발표에 우려하던 HP 직원들의 동요를 기억하고, 얼마 후에 피오리나가 HP는 직원을 대량해고를 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직원을 해고했을 때의 탄식도 전해들었고, 회사 안의 일보다는 대외 활동에 더 치중한다는 우려를 하는 직원을 목격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HP의 직원들의 대화 속에서 피오리나가 개인 전속 미용사를 출장시 항상 대동하고, 프랑스 지사를 방문할 때 자신이 탄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있도록 나무까지 베도록 시켰다는 식의 루머가 나돌기도 했었다.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어쨌든 피오리나는 일반 직원들에게 그리 존경받는 인물상은 아니었던 것같다.

하지만 피오리나의 활동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최선을 다해 비교적 최고의 선택이라고 믿는 쪽으로 일을 해 나갔던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그 당시의 HP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었고 그래서 전통적인 사업 부문이었던 계측장비와 의료기, 전자부품 등을 떼어내 애질런트(Agilent)라는 이름으로 분사시켰고, 나머지 PC와 주변기기 부문도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업 형태를 필요로 했다. 회사의 덩치는 계속 커지는데 수익은 그 덩치에 걸맞게 증가하지 못하니 위기감이 점점 팽배해졌다.

어쩌면 그 시점에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악역을 맡아 일을 해치워줄 사람이 필요했고 또 영업활동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대두됐는데, 바로 그게 피오리나를 영입한 목적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피오리나는 HP 내부에서 커 온 사람도 아니고 또 공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그쪽 분야에서 직접 일해 오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PC 산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CEO로 선택됐으니 말이다. 그녀의 강력한 추진력과 카리스마 높은 경영방식이 대주주와 이사회에 어필했을 것임은 틀림없는 일이다. 어째 됐든 피오리나는 이제 HP를 떠났고 HP는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해야하는 상황이 됐다.

이번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선 회사 내부의 임직원들과의 융합의 중요성이다. 피오리나는 그 점에서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일 욕심이 많아서인지 그녀는 자신의 권한을 다른 이들에게 이양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인색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컴팩을 HP에 합병한 이후에 컴팩의 전 CEO를 비롯한 상급 임원들 여럿이 HP를 떠났고 심지어는 HP에서 오랫동안 재직하던 임원들까지도 회사를 떠났다. 그들이 목적지로 택한 곳은 어딜까. 적지 않은 경우가 바로 HP와 직접 또는 간접적인 경쟁을 하고 있는 기업들이었다.

피오리나의 이런 성격 때문에 회사 내부의 운영을 직접 맡아 할 사람들이 부족해졌다는 분석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피오리나가 HP를 떠난 직후에 넘버 투, 넘버 쓰리 등으로 줄 세워 볼 때 별로 인재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차기 CEO 및 경영진 선택의 폭이 크게 좁아졌다는 평가까지 있다. 결국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흔히 거론하는 인화단결과 인재육성의 측면에 소홀했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가뜩이나 외부의 적들을 상대하는 것만도 힘든데 내부에 수많은 적들을 만들고 게다가 강력한 수비수를 만들어놓지 못한 점이 그 개인적인 측면은 물론 회사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 셈이다. 최소한 전통적인 ‘HP Way’를 그리워하는 적지 않은 수의 임직원들이 자신들의 CEO를 마녀라고 생각하는 상황은 정말 해소했어야 했다.

또 다른 한가지 사항은 PC 관련 업계의 역동성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일반 소비자 대상의 PC 및 프린터 사업은 루슨트의 장비 위주 사업보다 훨씬 다양한 제품들이 더 짧은 주기를 가지고 개발되고 생산돼 판매되고 있는데 피오리나의 활동은 그런 역동성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게다가 소프트웨어 및 기업 IT 서비스 부문에서 IBM에 대항해 정확한 결정을 빠른 속도로 내리면서 일을 진행해야 하는데, 빈번히 중요한 대목에서 실패를 한 것도 그런 문제를 시사해 주고 있다. 부임 초기에 PwC 사의 컨설팅 부문 인수를 시도하다가 전면 백지화했는데 2년 뒤에 IBM이 그 부문을 인수해버린 예도 있고, 최근에는 소프트웨어 업체인 베리타스(Veritas)를 인수하는 협상 단계에서 시간을 끌다가 시만텍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어쩌면 피오리나는 컴팩과의 합병에만 너무 치중했고 컴팩의 인수를 모든 문제가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컴팩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합병했다는 평가에 만족해 방심했을 수도 있다. 당초의 기대는 ‘HP+Compaq = 1+1 = 3’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얻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컴팩과 HP가 합병의 회오리 바람에 있는 동안 델컴퓨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약진했고 ‘1+1 = 1.5’의 계산이 돼 오히려 델컴퓨터만 띄워준 결과가 됐다.

이제 HP 함대는 CEO 없이 항해를 해야 한다. HP는 과연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가. 업계에서 나오는 의견들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들리는 것이 회사를 둘로 쪼개리라는 관측이다. PC 부문 따로, 그리고 프린터를 비롯한 이미징 부문 따로의 방향이다. 예전에 계측장비와 의료기 등을 애질런트라는 이름으로 분사시켰던 것처럼 또 다시 분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프린터와 PC가 서로 방해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사업을 추진해 나가게 한다는 말인데, 여기엔 또 좀 어려운 측면이 있다.

두 부문의 분리를 주장하는 쪽의 설명은 델 컴퓨터와의 경쟁을 위해서는 델처럼 온라인 판매를 통한 직판 형태를 갖춰야 하고, 계속 대리점을 통한 판매를 병행하면 도저히 가격 경쟁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대리점 업체들의 반발로 인해 PC가 아닌 다른 주변기기들, 특히 프린터 같은 제품군의 판매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프린터는 HP가 거의 유일하게 시장을 이끌어가는 부문인데 자칫하면 PC 부문 경쟁의 불똥이 그쪽으로 튈 수 있고 그걸 방지하기 위해 아예 서로 다른 회사로 만들어버리는 방법인 것이다.

피오리나가 재직하고 있던 시절에도 그런 분리 요구는 주주들에 의해 제기돼 왔지만 그녀는 끝끝내 PC와 프린터 부문은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도 관철시켰다. 하긴 HP의 사업부문에서 유일하게 짭짤한 흑자를 내는 것은 잉크 카트리지 장사밖에 없으니 그런 고집을 피울 만도 하다.

이제 피오리나가 사라졌으니 프린터 부문의 분리가 가시화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PC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델컴퓨터의 경우, 얼마전부터 프린터 사업에도 뛰어들어서 조금씩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경우는 또 어떻게 봐줘야 할까. HP는 프린터를 떼어내고 델은 프린터를 추가하는 상황이 되니 말이다. 애초부터 온라인 직판으로만 커 온 델컴퓨터와 대결하기가 참으로 힘겨워 보인다. 몇 년 전에 애질런트를 분사시키고 나서도 HP와 애질런트 모두 계속 죽을 써왔으니 분할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만약 프린터 부문을 분사시키게 된다면 HP라는 이름은 어느 쪽이 가져가게 될지도 흥미로운 일이다. 최초의 HP는 계측장비 기업이었다. 따라서 전에 그 부문을 독립시킬 때 전통적인 계측장비 부문이 HP라는 이름을 이어받는 것이 당연한 순리였겠지만 일반 소비자 상대의 제품을 판매하는 컴퓨터 부문에 있어서 HP라는 브랜드는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었기에 계측기 부문이 양보를 했다. 그런데 PC 부문과 프린터 부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HP라는 브랜드가 중요하게 작용하게 될지를 따져보면 당연히 프린터 부문이 아닐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HP 하면 프린터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니 말이다.

만약 프린터 및 스캐너 등의 이미징 제품 전문 기업의 이름이 HP로 결정된다면 또 다른 재미있는 상황이 될 것 같다. 남은 PC 부문의 이름은 무엇으로 해야 할까라는 숙제가 남아서이다. 필자가 강력하게 보고 싶은 것은 컴팩의 이름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HP의 기존 제품 라인에서는 프리자리오 혹은 프로라이언트, 아이팩 등과 같은 컴팩의 옛 모델명이 아직 살아있다. 그런 이름들은 아직도 HP 고유의 모델명보다 더욱 강하게 소비자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으니 더욱 합당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싸움에서 또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도전하느니 스타일은 구겨도 실리를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HP라는 이름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느낌을 주지만 컴팩이라는 이름만큼 컴퓨터의 전문적인 느낌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좌우에 IBM과 델컴퓨터를 두고 그 사이에 끼어서 분투하고 있는 HP의 상황은 꽤 힘겨워 보인다. 이제 이사회에서는 또 다시 CEO 자리에 앉힐 인물을 찾기 시작하고 있는데 과연 새 인물은 HP를 정상화시킬 수 있을까. 그는 과연 1990년대 초에 겉잡을 수 없이 몰락할 것만 같았던 IBM에 부임했던 루 거스너의 신화처럼 극적인 소생의 드라마를 쓸 수 있게 될까. 오랫동안 최고의 존경받는 회사로 자리했었고 ‘HP Way’라는 특유의 기업문화로 모든 임직원들에게서 사랑받아왔던 HP는 어떤 기업이 돼 또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갈 것인가.

이제 ‘Holding out for a hero’ 노래 제목처럼 위기에 빠진 HP를 구해낼 영웅의 출현이 필요한 때이다. 앞으로 펼쳐질 흥미진진한 하이테크 업계의 또 다른 영웅시대 같은 드라마를 기대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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