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사랑을..

정말 나이 먹었을 때는 체력, 정력, 기억력, 판단력, 재력, 지능.. 등등의 전반적인 면에서 방구석 한편에서 쪼그려 앉아 있어야겠구나 싶을 때이다. 20대 나이에도 체력이 형편 없을 수 있고 기억력을 엉망일 수도 있다. 예전엔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라고 얘기할 때 그저 위로하기 위한 립서비스려니 싶었지만, 그게 사실 맞는 말이다. 스스로가 늙었다거나 뒤쳐진다라고 느껴지지 않으면 진짜로 늙은게 아니다. 늙었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보다는 뒤쳐진다는 말이 옳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나이 먹은 시점의 사랑은 오히려 더 진국이 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은 이제까지는 야속하기만 했을지 모르겠지만, 오래전에 입었던 상처의 흔적을 발겨한 뒤에는 오히려 고마워진다.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 해준다. 흉터는 남아있지만 더 이상 곪아가지 않는다. 시간의 미덕은 아픈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는 조화를 부린다. 흉터는 여전히 보이지만 더 이상 쓰라리진 않고 색깔 예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 세월을 몸으로 잔뜩 머금고 늦여름의 인생에 서있는게다.


미간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세로로 나 있는 주름을 보면 지나간 이야기가 보인다. 날 찌푸리게 만든 이야기, 날 웃게 했던 이야기, 날 고통 속에 찡그리게한 순간들.. 내 눈 아래의 움푹 패인 고랑은 밤을 지새며 고민하던 시간들,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잠을 쫓으며 열중했던 시간들을 보여준다. 나이 먹어가는 너의 미간에도 네 입가에도 그 세월 속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하나 하나 짚어보며 이야기를 들어도 좋다만, 그건 이제 뒷춤에 접어넣고 이젠 아름다운 여름에서 감칠맛 있는 가을을 향해 가고 싶다.


그러나 가을의 사랑은 한편으론 애처럽다. 부부간의 사랑이건, 잠깐 피운 바람이건, 외도건 무어라도 부르건, 중년의 사랑은 아름답기보다는 조금은 외로워 보인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소년같은 애잔한 심정을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에. 마음을 조여가며 그리워하고 애닲아하고 아이처럼 작은 기쁨에 감사할 마지막 기회이기에. 사심없이 상대를 대하며 그와 함께 지낼 날이 그래도 적지 않게 남아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뜨거운 불꽃을 아직은 피울 수 있고 즐길 수 있다고 나름대로 안도감을 가질 수 있기에. 마지막 불씨가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행복함과 함께 공허감을 느끼게 되기에…


정말로 애처러운 것은 사랑이건 불륜이건 바람이건 외도건 무엇이던지간에 지기전에 마지막으로 피우는 벚꽃의 몸부림이다. 그만큼 애처럽더라도 착각일지라도 그런 마음을 한번 마지막이 될지라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리라.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이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랑은 어쨌든 불꽃이 튀게 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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